평산 신씨 유적 보감

신정수(강동구 천호동 거주)

작성일 : 2020-08-26 17:04

 

평산신씨 시조 신숭겸은 신라 말엽에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해 고려를 창건한 개국원훈으로 태조가 표창으로 사관한 것으로 고려사는 기록하고 있다. 신숭겸은 능산 시호는 장절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전라도 곡성현 출생으로 기록돼 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몸이 장대하고 천성이 용맹스러웠으며 신령한 기품과 기민한 지략에 활쏘는 재주가 백발백중일 만큼 뛰어났다고 한다.

 

고려 927년 태조 10, 후백제 견훤은 군사를 이끌고 경상북도에서 전투를 벌였다. 갑자기 회군해 영천을 가로질러 경주를 침공했다. 당시 신라왕이었던 경애왕은 종친과 신료들과 더불어 초석정에 나가서 놀이하다가 문득 적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모두 함몰됐으며, 이에 견훤은 경애왕을 죽이고 김부를 왕으로 앉히니 경순왕이다. 견훤의 경주 침략 소식을 들은 왕건은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고 직접 정예한 기병 5천을 친히 거느리고 군대를 통솔해 경주로 향했으나 견훤은 이미 경주에서 퇴각해 돌아가고 있었다. 왕건은 별수없이 공산무주 대구의 팔달 공산에 진을 쳤고, 이는 곳 동화사이며, 여기서 견훤을 맞아 기다렸는데 견훤이 반드시 이길을 지나 회군할 것을 판단했다. 그 이유는 동화사와 파계사가 모두 견훤 세력과 깊이 밀착돼 있는 진표율종 즉 백제계 법상종에 속한 사찰로 신라 영토 내의 견훤세력 근거지였던 때문이다. 이에 고려군은 공산동수에 이르러 길목에 매복했다가 견훤을 갑자기 들이쳐 격파하니 처음에는 견훤군이 갈팡질팡했으나 워낙 군사가 많은 후백제군은 점차 수습이되면서 형세가 역전되기 시작해 도리어 왕건군이 형세가 매우 몸시 위급했다. 병력이 열세였던 고려군은 점점 대패했으며, 태조와 장수들은 후백제군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허사였다. 이 공산전토에서 적군에 포위를 당해 전세가 몹시 급하게 되자 태조와 용모가 닮았던 심숭겸 장군은 태조를 숨게 하고 그를 대신해 전투를 지휘하다 전사했다. 신숭겸은 태조의 수레에 갈아타고 태조와 갑옷을 바꿔입고 더불어 힘껏 싸운 것이다.

 

견훤의 군사는 신숭겸을 태조로 여기고 그 머리를 잘라서 창에 꿰어 달자 포위했던 군사가 조금 풀리어 태조는 겨우 단신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지금도 공산전투가 치러졌던 팔공산 일대는 신숭겸과 왕건의 관련된 전설과 지명이 많이 관련돼 있다. 팔공산의 이름도 고려 태조 왕건이 신숭겸, 김락, 전이갑 등 여덟 장수들의 순사로 인해 팔공산이라고 했다는 일설도 있다.

 

본진에 돌아와서 곧 신숭겸의 시신을 찾았으나 머리가 없어져 찾을 수가 없게 되자 대장 유금필 등이 말하기를 신숭겸 장군의 왼발 아래에 사마귀의 무늬가 있었는데 북두칠성과 같았다라고 해 찾아낼 수 있었다. 태조는 명해 머리와 얼굴을 새겨 만들게 하니 마치 생시의 모습과 같으니 이 두상을 금으로 만들어 도굴당하지 않도록 봉분을 셋으로 했다.

 

오늘날까지 이 묘소는 강원도 지방문화재 기념물로 지정돼 평산 신문의 성역으로 후손들의 자랑이 돼 평산 신씨 80만 후손들이 춘추로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신숭겸은 전라도 곡성현 사람인데 태조가 여기서 사성했다. 속전하기를 숭겸이 일찍이 태조를 따라서 사냥을 갔다가 삼란에 이르렀는데 마침 기러기 세 마리가 맴돌고 있었다. 태조가 말하기를 누가 이를 쏘겠는가 하니 숭겸이 말하기를 신이 쏘아보리다 했다. 태조가 궁시와 안마를 내리자 숭겸이 말하기를 몇째 기러기를 맞추리까 하니 태조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셋째 기러기 왼쪽 날개를 쏘라고 했다. 숭겸이 명에 응해 과연 시키는대로 맞히는지라. 태조가 탄복하고 아울러 기러기를 쐈던 근방의 땅 3백결을 하사해 자손대대로 그 조를 거두게 하고 그곳을 궁위라고 이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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