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기고= 해공 신익희 선생

신정수(강동구 천호동 거주)

작성일 : 2021-08-25 13:40

 

본관은 평산이고, 자는 여구이며, 호는 해공이다.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서하리이다. 1908년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와세다 대학 경학부에 들어가 한국 유학생과 학우회를 졸업하고 총무 회장을 역임하고 기관지인 학지관을 발간해 학생운동을 했다.

 

1913년 졸업과 동시에 귀국 고향에 동명 강습소를 열었으며, 서울 중동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7년 보성전문법률상업학교 교수가 됐다. 1918년 최빈·송진우들과 독립운동의 발향을 논의, 19193.1운동 당시에 해외와의 연락을 맡았다. 그해에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수립과 동시에 내무차장, 외무차장, 국무원 비서장 외무총장 대리 문교부장관 등을 역임, 내무부장관으로 있으면서 광복과 더불어 귀국, 김구 등 임시정부 계통과는 노선을 달리해 정치공작대 정치위원회들을 조직해 이승만과 접근하고 1946년 대한독립촉성 국민회부위원장 자유신문 사장, 국민대학교 초대학장을 겸직하다가 그해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대의원에 피선, 1947년 의장이 됐다.

 

지청천의 대동청년단과 합작해 대한국민당을 결성하고 대표 최고위원이 됐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돼 부의장이 됐다가 의장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자 의장에 피선, 정부수립 후 이승만과 멀어지기 시작한 한민당의 김성수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9년 민주국민당을 결성하고 위원장에 취임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 다시 국회의원에 피선되고, 1955년 민주국민당을 민주당으로 확대, 발전시켜 대표 최고위원이 됐다.

 

1956년 민주당 공천으로 대통령에 입후보, 자유당 이승만과 맞서 호남지방으로 유세 가던 중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급사했다. 해공 신익희 선생이 돌아가시며 산하는 몸부림치고 초목과 금수까지도 울었으며 백성들은 목놓아 통곡하고 말었다.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1962년 대한민국 국건 공로훈장을 받았다. 해공선생은 조국의 독립, 조국의 통일, 민주의 실현, 정의로운 사회의 구현 4가지 목적을 위해 헌신하고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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