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리오노프의 ‘유리’

최서영 (모스크바대학 대학원 러시아 미술사 전공, russartchoi@gmail.com)

작성일 : 2018-12-31 10:44

 

라리오노프의 1912년 작 유리는 전편에 소개한 1910년 작 나무와 같은 화가의 그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불과 2년의 차이를 두고 제작된 이 그림은 삐죽삐죽한 선들 때문에 사물의 형태를 알아보기가 쉽지 않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유리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다양한 유리잔들이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정물화인 것을 알 수 있다.

 

화가는 이 그림에서 유리로 된 다양한 사물들 - 와인잔, 유리컵, 유리병 등 서로 다른 색깔과 크기, 두께를 가진 다양한 유리소재를 보여준다. 그러나 라리오노프가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은 유리 그 자체가 아닌, 바로 유리를 통해 반사되는 빛이었다. 유리잔들의 표면으로부터 캔버스 사방으로 뻗어나간 쐐기 모양의 직선들이 바로 화가가 색깔과 형태로 구현하고자 애썼던 빛의 궤적인 것이다.

 

라리오노프와 그의 아내 곤차로바는 눈에 보이지 않는 빛 그 자체를 그리고자 했고 당시 각종 급진적 선언문이 넘쳐났던 아방가르드의 흐름 속에서 1913광선주의(Rayonism)’ 선언을 발표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광선주의가 입체주의, 미래주의, 오르피즘의 종합 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이 작품에서도 입체주의의 기하학적인 느낌, 미래주의의 다이나믹한 율동성, 오르피즘의 빛나는 색채를 인지할 수 있다.

 

라리오노프와 곤차로바는 광선주의 스타일의 그림을 그릴 때 종종 닭, 고양이 등의 동물들을 선택하곤 했다. 닭과 고양이는 동물이기 때문에 운동성이 있어, 거칠게 뻗어나가는 직선들로 인해 그 움직임에 역동성이 더해진다. 반면 이 유리잔들같은 정물화에서는 기본적으로 움직임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그 부동의 순간에도 사람의 망막으로 하여금 유리잔을 볼 수 있게 하는 빛은 유리잔으로 투과되기도 하고 반사되기도 하면서 광속으로 끊임없이 운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빛을 그리고자 한 광선주의 화가의 손끝에서는 정물화 또한 역동적인 형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광선주의 초기 작품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빛의 형태는 사물 표면에서 뾰족하게 발산해 나가는 모양새로, 일견 유치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시각으로 전위 그림들을 논한다면 미래주의의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뒤샹의 계단을 내려가는 나부에서 다리가 여러개로 묘사된 여성의 모습 역시, 어린이 만화에 나오는 뛰어다니는 캐릭터들과 다를게 무어냐며 조소의 대상의 될 수 있을 것이다. 전위예술의 다양한 시도들은 기존 회화의 전통적인 방법론에서 벗어나 어떻게 사물을 화폭으로 옮길 것인가 라는 명제에 대한 화가들의 치열하고 진지한 탐구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후 곤차로바와 라리오노프는 사물을 광선주의 스타일로 그리는 것에서 나아가 순수한 빛의 움직임, 즉 직선과 색깔로만 구성된 추상을 보여주면서, ‘붉은 광선주의’, ‘붉고 파란 광선주의등 색채를 제목으로 하는 작품들이 주를 이루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의 광선주의는 빛 그 자체의 향연, 거친 직선들과 색으로 이루어진 추상화가 된다.

 

러시아 화가들에 의해 주창된 광선주의는 러시아 내에서도 오래 지속되지 못했으며, 세계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빛의 움직임을 회화로 표현한다는 대범한 선언은 이후 자주적으로 전위 양식을 탐색해 나가는 러시아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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